여기 정말 공감되는 칼릴 지브란의 시가 있다.
너희들의 아이들은 너희들의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생명 그 자체에서 태어나 삶을 갈망하는 아이들일 뿐이다.
그들은 너희를 통해서 왔으나 너희에게서 온 것은 아니며,
너희와 함께 있을지 모르나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너는 그들에게 사랑을 줄지언정 생각을 건넬 수는 없다. 그들에겐 그들의 생각이 있으니.
너희는 그들의 신체를 보살펴줄 수는 있으나 영혼을 보살필 수는 없다. 그들의 영혼은 네가 꿈에서라도 갈 수 없을 내일의 공간에 속해 있으니.
너희는 아이들처럼 되고자 노력할 수는 있으나, 그들을 너희처럼 만들려 하지는 말라.
삶은 거꾸로 흐르지도, 어제에서 멈추지도 않기 때문이다.
격하게 공감하는 글귀. 동시에 생각하게 된다. 어째서 많은 부모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가?
이런 말을 굳이 읽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자녀란 부모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부모라는 통로를 통해 신체를 만들어 이 세상에 왔을 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몇 십 년을 살고도 깨닫지 못하는 걸까?
아이들은 부모를 기쁘게 해주려고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그들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 태어났으며, 해답을 찾고 종국엔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살아간다.
자녀가 부모가 사는 방식에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부모도 자녀가 사는 방식에 간섭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어쩌다보니 가족의 관계로 이어지게 된 남남이다.
부모는 아이가 살아가는 방식에 일체 간섭할 권리가 없다. 자녀의 삶은 완전히 그들 자신에게 귀속되어 있으며, 누군가가 도움좀 줬다해서 태어나서 죽을 때가지 온전히 그들의 것일 삶의 결정권을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다.
자녀가 부모의 가치관을 내버려두는 만큼, 부모는 아이에게 자신의 가치관과 세상의 다양한 관점을 소개까진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어느 하나로 강요할 수는 없다. 선택권은 아이들에게 있다.
아이는 거대한 생명의 흐름에 속해있으며 아주 잠깐 동안만 자신이 맡았을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부모는 자신의 자리, 즉 분수를 알고, 자연이 만든 또다른 생명인 아이에게 지나치게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는 스스로 성향을 파악하고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결정자다. 부모의 역할은 일반적인 경우 조력자에서 끝난다.
어떨 때는 그 조력조차 하지 않고 아이를 괴롭히기도 하는데, 그럴 때 자녀가 원한을 가지고 부모를 공격한다 해도 안타깝지만 이해할 수 있다. 부모는 가족이라는 관계로 이어져 있는 '남'이며, 남이 자신을 괴롭히면 그것을 멈추고 또 보복하고 싶은 게 사람의 자연스러운 심리.
효도란 있지도 않은 의무를 부모 편의대로 자녀에게 부과한 것에 불과하다. 왜 부모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역시 마찬가지로 왜 부모가 자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가? 둘 다 말도 안 된다. 남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희생은 누가 하든 건강하지 못한 일이다. 효도하지 말자. 그리고 부모는 자녀를 위해 삶을 버리지 말자. 어려울 것 같다면 아이없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다.
자기 자신의 영혼, 이 영혼이 사는 삶의 여정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없다.